[역사 이야기] 정동에서 알아보는 근대사

서울 정동에서 고종의 흔적 찾기

이순영 승인 2020.10.08 18:16 | 최종 수정 2020.10.08 18:24 의견 0

정동에는 고종과 관련있는 장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에서 생활하였으나, 을미사변을 겪고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고종은 정동의 덕수궁(경운궁)에 머무르며 정치활동을 하였습니다.
이 곳은 당시에 러시아, 미국 등 많은 서구열강의 공사관들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외교활동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1. 구러시아 공사관 → 2. 중명전 → 3. 배재학당" 순서로 이동할 예정인데,
지도에서 보이듯 시청역에서도 가깝고 서대문역에서도 가깝습니다.​

강화도 조약(1876)이후 일본, 중국을 포함하여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들은
서로 조선을 침략하려고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으로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을 몰아낸 뒤에 러시아가 조선의 일에 간섭을 하자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말았습니다.(을미사변, 1895)

​고종은 그 이듬해 아라사(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을 하였습니다(아관파천, 1896). 

(구)러시아 공사관 전망탑

원래는 H자 형태의 공사관 건물이었는데, 6.25 전쟁때 대부분 파괴되고
지금은 전망탑만 남았습니다. 러시아 공사관은 당시 정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H자형 공사관의 앞쪽의 방에서 고종이 지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
종은 이곳에서 1896년 2월부터 1년간 머물렀는데, 당시 한양 시내가 무척 잘 보였겠지요.
한양 시내를 내려다 볼 때 고종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힘
없는 조선을 강하게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을까요?
아라사의 공사관에서 내 나라를 내려다 보는 고종의 고뇌에 찬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전망탑에서 내려오니 정동공원 왼쪽에 붉은 문이 열려 있었는데요.

 

 

고종의 길(king's road)

이 길이 "고종의 길" 입니다. 이 길로 따라가면 덕수궁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고종의 길"은 고종이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갔던 길이 아니고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을 가며 지났던 길입니다.
지금껏 개방하지 않고 있다가 최근의 연구로 미대사관에서 보관하던 지도에
king's road 라고 표기된 부분을 복구하여 개방 하였습니다.

고종의 길을 따라 걷다보면 왼쪽으로 덕수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종은 아관파천을 시행한 이듬해 덕수궁으로 돌아와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을 선포(1897)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대한제국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하게 되는데,
그 때 세워진 덕수궁의 석조전, 배제학당, 정동교회 등을 정동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덕수궁에는 들르지 않고 돌아 중명전으로 향했습니다.
덕수궁은 이전에도 아이들과 많이 와 봤으니까요^^

 

아펜젤러

미처 계산에 넣지 않았는데, 중명전으로 가는 길에 오늘 가려던 세번째 장소인
배재학당과 정동 교회도 설립한 아펜젤러의 흉상이 있었습니다. 
조선 말엔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대부분 우리 나라에서 의료, 교육 분야에 힘썼고
마포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아펜젤러도 가족들과 함께 가족 묘역이 양화진에 있습니다.

 

이 건물이 바로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교회입니다. 
정동교회는 고종 제위 기간 중(1897)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데,
위에 보이는 건물이 '벧엘 예배당'입니다. 지금은 이보다 더 큰 교회가 왼쪽에 있어요.
외관을 살펴보고 부지런히 중명전으로 이동합니다.^^

 

중명전

중명전은 원래 고종의 서재로 쓰였던 곳인데, 1904년 덕수궁에 화재가 나면서
고종이 이 곳으로 거처를 옮겨 지냈어요.
이 곳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1905)이 체결된 슬픈 역사의 장소입니다.

을사늑약 복제본
을사오적의 을사늑약 체결 현장

당시의 을사늑약 체결 장면을 실물크기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정면에 바로 보이는 자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고요,
왼쪽 두번째 있는 사람부터 이완용,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
오른쪽 첫번째는 외부대신 박제순입니다. 이들을 을사오적이라 하지요. 

 

당시에 을사늑약을 끝까지 반대했던 한규설의 회고담을
영상으로 들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방문하신다면 꼭! 들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비통했는 지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습니다.

 

2층에서는 을사늑약 체결후 고종의 명으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여
열강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떠난 헤이그 특사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헤이그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입니다.
만국 평화회의장까지 달려갔지만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것도 분한데,
일제는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놓고 이런 일을 벌였다며, 고종황제를 폐위 하였습니다(1907).


전시장에는 퀴즈를 풀어 특사들을 회의장에 입장하게 해주는 코너가 있어요.

문제를 맞출수록 그들이 점점 헤이그에 가까워 지고,
마침내 이위종이 연설하는 장면까지 재생됩니다.
비록 퀴즈이지만 이렇게라도 한을 풀어드려야 할 것 같아요. ㅠ

 

관람을 마치고 나와 날씨를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 배재학당에 도착했습니다.

배제학당

고종은 대한제국을 설립한 뒤 "광무개혁"이라는 자주 개혁을 실시하며
정치, 군사, 경제 분야에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서양식 건물들을
많이 세웠습니다. 배제학당도 그 시기에 세워진 학교로 정동교회 앞에서 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근대적 학교입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유명한 분들이 배재학당을 많이 졸업하였습니다. 

 

호머헐버트의 사민필지

호머 헐버트의 사민필지.. 반가웠어요.
헐버트는 조선 말기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조선을 도운 선교사로 고종의 편지를
미국 대통령(시어도어 루즈벨트)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은 우리 나라와도 친했지만 미국과는 더욱 친한 사이였으니까요.
헐버트는 한글로 된 최초의 교과서(사민필지)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한글의 뿌리를 찾는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 영향은 주시경 선생에게 이어졌고,
주시경 선생은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개척자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
우리 나라를 너무나 사랑했던 헐버트는 1949년에 우리 나라에 초대받았지만
고령의 나이로 그 긴 여행을 버티지 못하고,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병사하여
양화진 외국인 묘역 안장되었습니다.

정동에서는 몇 걸음 걸을 때마다 근대문화 유산,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건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각 국 대사관, 예전 신문사 건물 등, 덕수궁도 있고요.
맛있는 가게들도 많아요. 작은 공원들도 있어서 걷다 쉴 수도 있습니다.

보고 느낄 것이 정말 많은 동네입니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얼른 다녀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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